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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 diary

꼬리 같은 건 생기지 않았다

틱 틱. 어두운 방에 손톱 깎는 소리가 들린다. 방에 들어가는 순간 우중충한 냄새가 진하다. 점등인은 침대 옆에 다리를 하나 접고 기대앉아 손톱을 깎고 있다. 이케아에서 산 진회색 커튼과 침대 옆 스탠드가 그의 취향으로썬 최선이었지만 여전히 침침하다. 그가 하는 유일한 자기 관리는 매일 저녁 비슷한 시간 같은 자리에 앉아 손톱을 깎는 일. 손톱을 뾰족하지 않게 적당히 마저 잘 다듬은 후 무표정으로 일어나, 가까운 책상 구석에 깎은 손톱을 털어놓고 침대에 누워 잠이 든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창문 앞으로 걸어가 커튼을 걷는다. 분명하지 않은 몸 한구석 어딘가가 뻑적지근하고 간지럽다고 느끼지만, 그닥 신경 쓰진 않는다. 그저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아침은 시리얼로 때운다. 매일 타는 6900번 빨간색 버스 중간 자리쯤에 앉아 회사로 간다. 평소랑 다를 바가 없다. 점등인은 자신의 자리에 가서 모니터를 켜고 슬리퍼로 갈아신는다. 점등인, 간절히 원하던 번듯한 직장에 들어왔지만 반복되는 업무로 번아웃 증후군 직전인 O사 경리팀 직원. 이 회사는 점등인에게 안정적인 소득을 제공한다. 그는 그만큼 이 일에 집중한다.
자리에 앉아 USB를 꽂는다. 메일을 확인하고 경리나라에 들어간다. 변동된 사항들에 대한 자료들을 수집하고, 클리어 파일에 출력물로 잘 정리해놓은 계약서나 견적서의 내용과 입력을 맞추는 일을 반복한다. 어제도 했고 오늘도 하는 일이다. 학창시절의 생글생글했던 점등인이라면 이런 지루한 일을 왜 해야 하냐며 투덜댔을 것이다. 사실 지금 그의 입장에서도 별로 하고 싶은 일은 아니긴 하지만 말이다.
영업팀 직원들이 전해준 영수증을 정리해 엑셀에 입력한다. 문득 자신이 매일 깎아놓은 손톱을 밤에 집을 지나다니던 쥐가 갉아 먹고 내가 되어 당장 내일부터 해야 할 영수증 정리를 대신해주면 어떨까 하는 상상이 머릿속을 지나간다. 방금과 같은 종류의 상상은 굳이 머릿속을 휘저어 없애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이런 상황이 실제로 펼쳐질 거라고 상상하는 깜찍하고 싱그러운 일은 일찌감치 포기했다고 하는 게 맞겠다. 그의 상상은 언제나 실제 세계와 달리 터무니없고 흥미롭다. 하지만 이젠 전만큼 자주 이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언젠가 그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잠시 의문을 품었던 적이 있지만, 지금은 그저 안정적인 소득을 위해 일에 전념하고 있을 뿐이다.
점심시간이 지나고도 같은 일을 계속 반복하다가 출근했을 때와 정확히 반대의 순서를 반복해 집으로 돌아온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그는 문 앞에 놓인 작은 택배 상자를 발견한다. 팔뚝 길이 정도 되어 보이는 사이즈의 상자에는 특별히 적힌 메모 없이 그냥 투명한 스카치테이프만 한 줄 붙어있다. 점등인은 택배를 시킨 적이 없다. 그는 별 의문 없이 윗집 할머니께서 주신 것이겠거니 하고 집어서 집으로 가지고 들어간다. 윗집 할머니는 엘리베이터에서 오며 가며 만나곤 했는데, 만날 때마다 침울한 표정이 꼭 서울에 직장 다니는 자기 손녀 같다며 가끔가다 과일 같은걸 챙겨주고는 하신다. 반면 박스는 가볍게 스윽 들렸다.

집에 들어온 점등인은 상자를 책상 위에 올려두고 언제나처럼 잠을 잘 준비를 한다. 오늘은 점심을 많이 먹어서 저녁은 스킵한다. 옷을 갈아입고 세수를 하고는 넷플릭스를 켜면서 곧 잠을 잘 수 있다는 사실에 어느 때보다 손발이 빠르다. 잠은 누구에게나 공평해야 한다. 잘 준비를 다 하고 나서는 어느 저녁과 다를 바 없이 침대 옆에 앉아 손톱을 깎는다. 깎은 손톱을 털어놓으려고 간 책상에 아까 가지고 들어온 박스를 이제서야 열어본다. 안에는 박스보다 많이 작은 것이 들어있는지 처음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박스 안에는 하얀 쥐가 들어있다. 원래 알던 쥐보다도 긴 꼬리가 달렸고, 인형인지 진짜인지 잘 구별이 되지 않는다. 점등인은 머뭇거리지만 오래가지 않고 박스 안에 있는 쥐를 가까이 들여다본다. 그는 크게 놀라는 표정을 짓지는 않았지만, 어깨에서부터 소름이 돋아 얼굴이 터질 것 같다. 멈춰있는 쥐가 이렇게 얼굴 가까이 있는 게 처음이기 때문인지, 아까 낮에 회사에서 했던 손톱 먹는 쥐에 대한 상상을 누군가에게 들킨 것 같다는 또 다른 망상 때문인지 점등인의 속생각들이 혼란스럽다. 그는 스스로가 유치하다는 생각에 잠시 부끄러웠지만, 자신이 계속해서 후자의 상상을 하고 있는 것을 인정하자, 마음을 정할 수 있었다. 그는 또 잠시 고민했지만, 곧 깎아서 쌓아두었던 손톱을 한꼬집 집어 상자의 쥐 앞에 두고 잠을 잔다.
 
아침이 되어 다시 눈을 뜬 점등인은 사람인 자신의 모습을 한 쥐를 본다. 쥐는 점등인의 옆에서 그와 함께 일어난다. 쥐의 목소리는 꼭 녹음된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 같았고, 거울을 보는 것보다는 마치 진짜 자신의 모습을 처음 본 기분이 들었다. 점등인은 자신도 모르게 생긴 거북목이 어쩐지 거슬렸지만 어쨌든 자기 대신 회사에 갈 손톱먹는 쥐가 정말 생겼다는 사실에 희미하게 기쁘다. 그는 드디어 하루종일 잠을 잘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다시 잠을 자기 시작한다. 쥐는 점등인 대신 회사에 간다.
회사에서 돌아온 쥐는 자신의 일상을 점등인에게 이야기하는데 그는 영수증 정리를 하고, 회계 프로그램에 금액을 입력하고, 서류를 정리했다. 매일 그가 하던 똑같은 일을 했다. 팀 사람들과 점심시간에 회사 앞에 새로 생긴 태국음식점에 가서 밥을 먹었다. 점심을 다 먹고는 탕비실에서 커피를 뽑아 마시고 양치를 했다. 퇴근을 할 땐 이어폰으로 노래를 들으면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점등인은 회사에서 사람들과 거의 말을 하지 않고 혼자 밥을 먹는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질투인지 열등감인지 모를 감정이 목구멍을 타고 울렁울렁 넘어온다. 사실은 질투이지만 그는 처음 그 쥐를 받았을 때부터 어쩐지 기분이 안 좋았다고 생각해버린다. 그에게 집과 회사에서의 시간은 항상 다르게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점등인은 손톱을 깎지 않고 잠든 쥐의 손톱을 틱 틱 깎는다. 깎은 손톱을 한입에 털어 넣고 잠이 든다. 꼬리 같은 건 생기지 않았다.
 
 


 
 
영상 스토리텔링 기록 1 ✱ 문학에서 시작하는 이야기 쓰기
2023.3.6
 
문학에서 영감을 받아 시나리오를 써야한다는 주제를 받자마자 어린왕자가 떠올랐다. 단순하지만 풍부한 서사를 가진 흥미로운 인물들이 여럿 등장하기 때문에 그 중 한명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를 나의 질문과 연결해 써보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왕자가 다섯번째로 방문한 별의 주인인 점등인
왕의 명령으로 아침에 가로등의 불을 끄고 밤에 불을 켜는 일을 하고 있었지만 무슨 일인지 자신의 별의 자전속도가 빨라지는 바람에 거의 초단위로 가로등의 불을 켰다 껐다 하고 있다. 여섯 별의 주인 중 유일하게 어린왕자에게 긍정적인 평을 듣는다. 잘 보면 무지 고달픈 삶을 사는데도 불구하고 성실하게 할 일을 하는 사람이다. 명령이기 때문에 어쩔수가 없다고 끔찍하게 하기 싫어도 해야한다 생각하며 매일 가로등을 켜는 일만을 반복하며 살아간다. 누군가를 위한 행위를(별에는 아무도 살고있지 않다) 반복하느라 자신을 위한 일을 하지 못한다.
어린왕자는 그가 여유를 가질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하는데 그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자신의 인생에서 원하는 것은 그저 잠을 자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별의 자전이 빨라지면서 더 쉴틈없이 반복되는 작업은 그에게 비극 일 뿐이지만 어린왕자는 그 별을 24시간동안 지는 해를 1,440번이나 볼 수 있는 ‘축복’이라고 표현한다.
 
 
나에게 던졌던 질문
매일 반복되는 일상과 일에 대한 회의감에 누구나 한번쯤은 나 대신 또다른 내가 이 일들을 처리해준다면 잠이나 푹 자고싶다는 상상을 해본적이 있을것이다. 내 삶을 또다른 나에게 넘겨주었지만 정작 나 없이도 똑같이 잘 돌아가는 일상을 보게 된다면, 과연 나는 다시 나로 돌아가고싶다고 생각하게 될까? 무지 평범해서 고달프다 생각했던 일상을 다시 선택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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